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레닌그라드 공방전 (문단 편집) === 1941년 === 1941년 6월 22일부터 시작된 [[독일 국방군]]의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허를 찔린 [[소련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당시 독일군은 세 개 집단군으로 나눠서 [[소련]]을 공격했는데, 이 때 북부집단군이 공격한 도시가 바로 [[레닌그라드]]였다. 레닌그라드는 제정 러시아 시절(당시 이름은 상트페테르부르크)부터 수도[* 원래 수도는 모스크바였지만 [[표트르 대제]] 때 천도했다가 러시아 혁명 이후 다시 모스크바로 천도.]이자, 러시아의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중심지이면서 유럽을 향한 창구 역할을 했다. 게다가 소련 정권으로서도 [[1차대전]] 당시 [[러시아 혁명]]이 터지고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1차세계대전 발발 직후 황실에서는 민심을 고취시키기 위한 대책 중 하나로 수도의 명칭을 상트페테르부르크(독일식 이름)에서 페트로그라드(러시아식 이름)로 개명한다.]의 권력 장악으로 러시아 공산 정권의 시발점이 되었으며, 레닌 사후 그의 이름이 붙은 이 도시는 수도 모스크바 못지않은 상징적, 이데올로기적 중요성도 넘치는 곳. 이곳의 함락은 독일이나 소련에게나 매우 큰 사건이 될 터였다. 하여간 그 결과 소련 측은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다음 날 동원령을 선포해 방위군을 조직하고 도시 요새화 작업을 시작했다. 동시에 [[어린이]]와 [[여자]]를 미리 피난시켰는데, 오히려 이렇게 피난한 사람들보다 진격해 오던 독일군을 피해 레닌그라드로 몰려오던 이들이 훨씬 많았다. 어쨌든 레닌그라드 사령부에서는 기존 소련군과 피난자와 시민들 사이에서 뽑은 의용군을 포함한 병력을 방어선에 배치해 전투에 대비했다. [[빌헬름 리터 폰 레프]] [[원수(계급)|원수]]가 지휘한 북부집단군의 레닌그라드 공격은 7월 중순에 시작되었는데, 그 동안 소련군을 탈탈 털어오던 독일군은 레닌그라드에 상당히 견고하게 구축된 방어선에 좀처럼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빡친 [[아돌프 히틀러]]는 7월 27일에 북부집단군 사령부를 시찰하면서 레프에게 12월까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레닌그라드를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한편 1939년 11월 소련이 핀란드를 침공하여 벌어진 제1차 소련-핀란드 전쟁([[겨울전쟁]])으로 영토의 10%나 소련에게 빼앗긴 핀란드는 이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 칼을 갈고 있었다. 핀란드는 여러나라에 도움을 타진했으나 영국, 프랑스 등이 사실상 거절한 가운데, 1941년 7월말 독일과 동맹을 맺고 독소 전쟁에 참전하여 레닌그라드를 공격해 왔다. 독일과 핀란드의 공격에 소련군의 방어선도 버틸 수는 없었고, 8월 말에서 9월 초까지 독일군 [[포병]]들은 레닌그라드 시내에 무차별 포격을 가했고, 이 과정에서 수천 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 와중에 지노비 콜로바노프와 그의 KV-1 부대가 하루 동안 독일 제6기갑사단의 발을 묶어 놓는 등 소련군은 분전했으나, 결국 8월 20일에 레닌그라드는 독일군과 핀란드군에 완전 포위되어 지상으로 통하는 모든 탈출 경로가 차단되었다. 하지만 그 시점에서 핀란드군은 레닌그라드로 더 이상 진격하기 보다는 [[겨울전쟁]] 때 잃었던 카렐리야 지방의 수복에 집중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독일 육군 사령부의 참모인 [[알프레드 요들]]이 핀란드군에게 레닌그라드 공세를 강화할 것을 요청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어쨌든 독일군은 9월 8일에 자신들의 병력만으로 시의 북부에 위치한 라도가 호수에 다다르면서 도시의 육상 통로를 완전히 봉쇄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오시프 스탈린]]도 자신의 친구라는 이유로 계속 시의 방어를 맡겨놓았던 [[클리멘트 보로실로프]]를 더 놔둘 수 없었고, 방어 실패의 책임을 물어 해임했다. 후임자로는 그 때 막 스탈린과 작전 계획을 놓고 언쟁을 벌이다가 총참모장 직책에서 사임한 [[게오르기 주코프]]를 임명해 보냈다. 하지만 주코프는 독일군의 맹렬한 공세 속에서 레닌그라드로 부임하러 가는 동안 많은 시간을 허비해야 했고, 그 사이인 9월 12일에는 레닌그라드에서 식품창인 바다예프 창고(Бадаевские склады)가 독일군의 [[폭격]]으로 전소되면서 식량 수급에 적잖은 차질을 빚게 되었다. 창고가 목제여서 독일군의 폭격을 받아서 전소되어버렸다. 바다예프 창고에 저장된 밀과 설탕은 각각 3천 톤, 2500톤에 달했는데, 창고에서 건진 밀과 설탕은 각각 1천 톤과 900톤에 불과했다고 한다. 단 이 창고가 전소되어 식량 수급에 큰 차질이 빚어졌다는 것은 과장된 것이다. 바다예프 창고에 저장된 밀과 설탕은 레닌그라드에 저장된 분량의 4.3% 정도였다. 9월 12일 전까지 육체 노동자(рабочий), 사무직 노동자(служащий), 아동 및 부양가족(Дети и иждивенцы)에게 각각 일일 600g, 400g, 300g의 빵이 배급되었고, 이렇게 9월 2일부터 11일까지 레닌그라드에서 소비된 빵이 일평균 2천 톤 가량이었므로, 밀 3천 톤은 레닌그라드 주민을 1.5일(10월 이전 기준)에서 3일(10월 이후 기준. 배급량이 1천 톤으로 감소함)은 먹일 수 있는 분량이었다. 한국에서는 어째선지 바다예프 창고가 아니라 바야뎁스키 상점이라고 잘못 알려졌다. Склад는 [[러시아어]]로 '[[창고]]'인데... 하지만 이 시점에서 독일군도 히틀러의 오락가락하는 지휘 방침으로 혼선을 빚고 있었는데, 히틀러는 레프에게 북부집단군에서 전차 부대들을 빼내어 [[모스크바 공방전]]에 투입하라고 지시했다. 며칠 후인 9월 19일에 북부집단군은 레닌그라드 시 경계를 약 10km 앞둔 지점에서 진격을 멈추었고, 여기서 계속 공격하기 보다는 포위망을 풀지 않은 채 레닌그라드에 억류된 시민들과 군인들이 모두 '''굶어죽도록''' 내버려두는 작전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히틀러는 공공연히 '우리는 (레닌그라드) 시민들의 생명을 살리는 일 따위는 관심 없다'고 떠벌이면서 소련군과 시민들을 조롱했다. 그렇다고 주코프의 노력으로 사기를 회복한 소련군은 그 정도로 약체화되지는 않았다. 11월 10일에 레닌그라드 방어군은 시 북동부에 위치한 티흐빈을 독일군으로부터 탈환하는 첫 반격전을 벌여 성공했고, 독일군은 핀란드군과 합류할 위치를 잃었다. 이 때부터 레닌그라드의 상황이 소련 바깥으로 알려지기 시작했고, [[영국]]과 여타 [[영연방]] 국가들은 핀란드를 추축국으로 규정하고 [[선전포고]]를 발표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